'관용의 울타리 안'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4.04.13 이미지 by 작은이
  2. 2010.05.13 예수는 왜 어린이 같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했을까? by 작은이
  3. 2008.11.08 블로그를 옮기고 끄적끄적. (1) by 작은이
  4. 2007.09.17 김규항의 '품위전쟁' by 작은이
  5. 2007.09.17 비동성애자가 왜 동성애에 관해 말하는가. by 작은이
  6. 2007.09.16 강준만의 '심형래의 디워와 취향전쟁' by 작은이
  7. 2007.09.16 김규항의 [타인의 취향] by 작은이
  8. 2007.09.15 관용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by 작은이
  9. 2007.09.15 [퍼온글]크리스찬은 동성애를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by 작은이
  10. 2007.09.13 BL만화(야오이만화)의 인기에 관련해서 by 작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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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의 울타리 안 : 2014. 4. 13. 22:44




Posted by 작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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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종교 이야기나 좀 해보자.

예수는 왜 어린이 같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했을까?

어떤 사람은
어린이가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 말씀 내지는 목사님이나 신부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한다.

10분간만 웃어주자.

어린이가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다고?

그런데 왜 주구장창,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착한 어린이라는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펼칠까?

맞다.
아이들은 부모님 말씀을 결코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님은 혈압을 올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할 때가 많은 거다.

예수님이 이런 어린이를 언급하신 걸까?
그렇지 않다. 결코,

우리는 어린이의 특징 중 하나, 아주 강렬한 특징을
이승기가 나오는 CF에서 볼 수 있다.
순수한 오렌지로 만들었다는 CF에서
이승기의 동생으로 나오는 여자애는 줄기차게 묻는다.
왜?
라고.

어린이들은 가만 내버려두면
궁금해서건 아니면 시비를 걸 의향이건간에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엄마, 해는 왜 떠?
밥은 왜 먹어야 해?
학교는 왜 가?
아빠랑 엄마 몸은 왜 달라?
기타 등등.

이러한 아이들의 질문은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상 어떤 종교의 교리이건
'왜'라는 질문이 해당되지 않을 만큼 당연한 교리는 없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리셨나요?
왜 설교는 목사님이나 신부님만 하죠?
왜 헌금을 해야 하나요?
왜 교무금이나 십일조를 내야 하죠?
왜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야 해요?
왜?
왜?

종교에서 '왜'라는 질문이 빠지는 순간이 바로 종교의 타락의 순간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율법들이 존재했고,
그 율법들은 물론 사악한 규정은 아니었다.
다만,
바리사이나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사제들은
그 율법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고민을 싹 빼버렸다.

왜 십계명이 만들어졌지?
왜 주일을 지키라고 하셨지?
왜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하셨지?
왜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되지?

이러한 '왜'라는 질문을 통해
그 율법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을 당시의 하느님의 의도에 대해 파악하면
우리는 좀더 잘 그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시키는 그대로만 하는 것은 노예,
그 이상을 자유롭게 해나가는 것은 자유인.

하느님께서 우리를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만드신 것은
바로 '왜'라는 질문을 통해
글자 그대로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로봇, 노예가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 적절히 움직일 수 있는 자유인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가 이삭을 뜯어먹은 사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배고픈 사람이 이삭을 먹는 걸 보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비난한다.
안식일엔 추수하지 말라는 규정 모르냐?

이 바보들은
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이 생겼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안식일에 쉴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음을
그 자유를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 노예, 그리고 사람이 아닌 말이나 소 같은 가축까지 함께 누리고,
그 쉽의 시간에 그러한 자유를 주신 하느님을 기억하며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를 누리며 쉬다가 배가 고프면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그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이삭을 뜯어먹을 수도 있는 거다.
그건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의 추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얻고 이해한 자는
하느님의 율법을 좀더 원론적으로, 근본적으로 지킬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왜'라는 질문을 빼버리고 문자대로만 믿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이젠 반대로 빠져나갈 구멍만 파고 있게 된다.
마치
성금요일에 금육재 지키라고 하자,
삼겹살을 포기하고 더 비싼 생선회를 먹으러 가는 인간들처럼 말이다.

아이들의 두뇌는 말랑말랑하며 자유롭다.
그래서 '왜'라는 질문이 나온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하느님이 '왜' 그렇게 만드시고 행하셨는지
끊임없이 물어야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그분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분이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지를 물을 때에만
우리는 그분의 의도를 더 잘 알고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도, 경제에도, 신앙에도,
'왜'라는 질문을
결코 내려놓지 않고 사는 삶

그것이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삶이다.
Posted by 작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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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블로그를 옮겼습니다.
티스토리로.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2.
이 블로그에는 소위 '야오이만화'라고 하는
BL만화에 대해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동성애자가 아닙니다.

3.
이성애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자가 존재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성애자란 모든 여자를 보고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사람을 말할 겁니다.
그런 이성애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 각각 취향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도 '특정 여자'를 좋아하기만 하면 이성애자로 집어넣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특정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지
이성애자는 아닙니다.
그는 그 여자가 '이성'이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특정 여자'라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 머리가 이해하는 동성애자들은
특정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지
그 특정한 사람이 '동성'이라서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 다음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이성이 되기보다는
같은 '동성'이 될 가능성이 높기는 합니다만
그것만으로 그가 '동성'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고 발정하는 괴물처럼 취급하는 것은
취향의 무시도 보통 무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제 생각이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4.
성적 소수자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성적 취향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는 러브호텔을 좋아하고 누구는 연인의 집을 좋아합니다.
성적 취향이 다르니 이들도 성적 소수자로 들어가야 할까요.

모든 이들의 성적 취향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만큼의 숫자가 존재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취향을 인정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괴물들이 있을 뿐입니다.

5.
저는 그들의 취향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의 생존과 나의 자존과 존엄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타인의 어떠한 삶의 형태에 대해 제가 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피곤한 세상이라는 생각 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특별한 활동을 하거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이 블로그 세상 안에서 저 한 사람만이라도
타인의 개별적 취향에 대해
무관심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저의 삶과 우연히 마주치는 궤적에 계실 때
자신의 취향을 신비롭게 보거나 징그럽게 보는
'관심'거리로서의 시선이 아닌
무관심의 시선,
그분들의 삶의 형태를 지극히 '일반적인 것'으로 인정해주는 시선 하나 정도는
만나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6.
타인의 취향에 무관심하겠다는 말과
그들의 취향에 가해지는 '획일적인 틀고정 개수작'에 무관심하겠다는 말은
다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작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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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첫 개설 축하드립니다.

(주소가 변경되었는데 '-전쟁'은 주소링크에 안 붙네요.
번거로우시더라도 링크 누르시고 '-전쟁'을 뒤에 붙여주세요')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에서 활동하시던 신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빈민사목위원회는 빈민을 중상류층으로 올려놓으려는 곳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빈민의 삶으로 '자발적으로' 내려오도록 만드는 곳이다.
원래 타인의 취향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사람들 치고
많이 갖지 않은 사람이 없는 법입니다.
적게 가진 사람은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데에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남이 뭔 짓을 하더라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 짓이 내 삶에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죠.
사람이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물질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걸 생각하게 됩니다.
예술을 찾고 철학을 찾는 거죠.
문제는 배부르고 등이 따뜻해서 돼지 같은 삶을 영위하는 자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볼 리는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자신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게 아니라 타인의 삶을 보고 깨달으셨죠.
그나마 부처님 정도 되니 타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지 한낱 돼지들이야 뭐...
'더 갖는다'는 걸 단념시킬 수 있는 세상.
그래서 자신의 안이 비워지고, 그럼으로서 공간의 여유가 생긴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 여유의 공간 안에 타인을 얼마든지 넉넉히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품위라는 것.
글쎄요.
전 주로 위선의 토대에 세워진 품위들을 많이 봐서.................... --;;
Posted by 작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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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이 물어보시더군요. 레즈비언이냐고.
왜 물어보시는지 단번에 알아챘습니다.
저는 '천주교'신자입니다.
'응?'이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계시겠군요.
개신교만큼의 외부적인 극성은 아니지만 천주교는 그 긴 역사동안
동성애를 단 한 번도 용인하거나 받아들인 적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 제가 왜 동성애에 관해 이곳에서 말하고 있을까요?
동성애만큼 '전세계적인 억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살아오면서 저는 제 개인적인 취향에 대해 정말 많은 억압을 받아왔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독특하고 엽기적인 취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저는 여자이면서 치마 입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치마는 여자가 특정한 위험에 처했을 때 빨리 뛰어 도망가거나 하는 것을 가로막죠.
그뿐이 아니에요.
기억하십니까? 치마 입은 여자분이 헬기로 구조되는 모습의 사진을?
뭐 그런 이유에서는 꼭 아니더라도 저는 제가 가진 옷의 취향이
사회적으로 여자, 직장인, 30대에게 허락하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만이 아니라 가정 내에서도요.
줄기차게 듣는 말이. '여자가 그게 뭐니?'냐는 거였습니다.
제가 가진 가치의 제1순위는 '인간'이 아니라 '여자'였던 것이죠.
그뿐이 아니라, 제가 읽는 책, 제가 보는 만화, 제가 보는 텔레비전 방송들,
이 모든 것에 대해 정말 줄기차게 주위로부터 보이지 않는 억압을 받아왔습니다.
음식은요?
저는 생야채는 좋아하지만 삶은 야채는 싫어합니다.
뭉글뭉글하고 들척지근한 맛이 나는 느낌이 너무 싫거든요.
그런데 밖에서 음식을 먹을 때 참 ....
"음식을 가려먹으면 성격이 괴상하다'라는 그 묘한 선입견 말입니다.
그런 말씀하시는 분들, 전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음식, 가리지 않고 드실 수 있으려나요?
아프리카의 애벌레 요리, 중국의 온갖 엽기적 벌레요리들이요.
그럼 반론하시겠죠? 그건 '특이한 음식'이라고.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특이한 것'이라는 기준을 누가 결정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특이한 걸 먹는 게 그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죠.
제가 아침에 밥을 안 먹고 빵을 먹으면 제3자가 불치병에라도 걸리나요?
제가 정장을 입지 않고 편한 옷을 입으면 제3세계가 경제난국이라도 당하나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말입니다.
정작 누군가가 관여하고 신경쓰고 돌보아야 할 상황에서는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굶주려 죽어가는 북한 주민이나,
제3세계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미국의 행태나,
서민을 외면하는 부자당 한나라당의 행태에 대해서
이런 분들은 절대 고개를 가로젓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부분일수록 자기자신에게까지 영향이 미치는데도 굳게 입을 다문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 게시판에서라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 종교의 교리가 특이한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가로막더라도 전 말하고 싶어요.
제 종교의 교주님과 동성애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개로 쓰겠지만 말이죠.
사실 성적 취향이라는 게 가장 싸우기 좋은 겁니다.
이건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거든요.
이 취향은 벌건 대낮에 시청 앞 잔디광장에서 드러나는 게 아니에요.
정신 이상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거 외부에서 타인의 시선을 즐기며 할 사람 없습니다.
누구나 성적 취향이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가려진 장소로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이 성적 취향은 그야말로 제3자에게 줄 피해가 전혀 없는 취향 중 하나에요.
그런데 도덕근본주의자들은 여기에 코를 들이밉니다.
관심들도 많아요.
도덕주의자들이라면서도 타인의 성생활에 대해 시시콜콜 알고 간섭하고 들여다보고 싶어합니다.
다들 관음증 환자들 같죠.
이런 커다란 이슈 하나 떼려잡으면, 소소한 일상의 취향 억압 정도는 이야기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전 동성애자도 아니면서 동성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실 전 남의 성생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가하지도 않고,
제가 써야 할 글들도 산적해 있거든요.
하지만
제가 제 취향을 온전히 존중받으며 이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저보다 더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빌려줘야 합니다.
마틴 니뮐러 목사님의 글로 끝맺을까 합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 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 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 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Posted by 작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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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야 제 이야기와 별다를 게 없어서 더 할 말은 없습니다.
그저 리플들을 보고 좀 이야기해보고 싶어져요.
전문경 : 디워현상의 문제점은 취향의 영역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평론과 기호는 비교 대상일 수 없기 때문이죠.
▶ 기호가 평론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까요? 영화평론가들이 언제부터 대중의 '취향'을 난도질하고도 전문성을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ANNBY : '디워전쟁'은 하나의 텍스트에 관한 '취향'이나 '계급'의 갈등으로 보여지지만 정말 우려스러운 것은 논쟁 과정 속에서 언뜻언뜻 비춰지는 '일상적 파시즘'의 공포가 아닐까요?
▶제가 보기엔 자라공포증을 능가하는 솥뚜껑공포증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거 아시죠? 그렇다고 솥뚜껑을 방생하려고 덤벼드는 무식한 짓은 하면 안 되죠. 자라는 자라, 솥뚜껑은 솥뚜껑입니다. 솥뚜껑이 자라가 되지는 않아요. 정말 우려스러운 건 일상적파시즘공포증이에요. 대중들이 뭐만 하려고 하면 파시즘과 애국질의 잣대를 들고 덤비죠. 취향 마저도요.
김수민 : 디 워 사태는 '취향 전쟁'의 문제가 아닙니다. 애국주의, 성장주의에 경도된 대중이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는 무비판의 '성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날뛰던 현상인 거지요.
▶무비판의 성역이 된 건 비평가들의 비평영역이죠. 비평이 제대로 되었는지 아닌지 검증받을 길은 요원하거든요. 그게 이번에 대중들에 의해 남김없이 까발려지자 들고 나온 게 '애국주의, 성장주의'입니다. 스크린쿼터땐 애국주의, 성장주의 안 들고 나오신 분들이 그런 소리 하셨으면 귀엽기나 하죠. 이 리플러에게 위대한 영도자는 비평가와 진중권씨일 거에요.
지나가다2 : 교수직 내놓으셔야 쓰겄소... 이건 뭐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야...
▶악플러가 디워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현상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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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대한민국에서 취향마저 평론가들에게 단죄되는 현상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날뛰어봤자. 이미 평론가들은 전문가의 자리에서 밀려난지 오래에요.
도대체 뭘 전문적으로 말하는지 알 도리가 없거든요.^^
제 취향은 제것일 뿐입니다.
Posted by 작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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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소가 변경되었는데 '-취향'부분은 눌러도 링크주소에 연결이 안 되네요.
번거로우시더라도 주소창에 -취향 을 이어붙여주세요. 그렇게라도 읽을 가치가 있는 글입니다.)
아마 이 글 때문에 김규항씨가 꽤나 욕을 먹는 것 같습니다.
김규항씨를 좋아하던 사람들조차 돌아서겠다고 말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전 이 글이 왜 틀렸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블로그에서 취향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했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들은 가장 황당한 이야기는
'디워는 훌륭한 영화가 아니므로 재밌다고 말하는 것은 비판받을 수 있다'라는 논지였습니다.
진중권씨 역시 디워는 훌륭한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강변했었죠.
불량식품이 왜 인기가 있는 줄 아십니까?
맛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맛'이라는 게 하도 다양한 취향이라 꼭 불량식품에 대해 맛있다고 다 느끼란 법은 없지만
실제 불량식품은 '맛' 하나로 밀어붙인 식품입니다.
영양이나 건강, 혹은 위생을 신경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사실 '맛의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불량식품을 따라갈 만한 건 없을 겁니다.^^
그럼 거기다 들이대고
'불량식품은 훌륭한 음식이 아니므로 맛있다고 말하는 것은 비판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곳은 디워를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라 관용을 이야기하는 곳이므로
이야기의 선후에 대해서 더 말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심형래도 별로 안 좋아하고, 디워를 보지도 않았으며
진중권씨의 애독자였고, 용가리를 본 적도 없는 저에게조차
디워에 대한 비평가와 기자들의 혹평은 대단히 가혹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를 재밌다고 말한 사람들에 대한 반응도 대단히 가혹했죠.
우리 사회엔 고급취향, 저급취향이라는 분류가 있습니다.
클래식, 예술영화, 명화를 즐기면 고급취향이고
대중가요, 상업영화, 누드사진을 즐기면 저급취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대중가요, 상업영화를 보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고급취향'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다만 그걸 즐기는 취향이 '틀렸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이번에 아주 잘 알게 되었습니다.
평론가들이 우리의 취향까지 검증해주고 결정해주는 사회라는 것을 말이죠.
제가 이 블로그에서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 커다란 차별과 취향난도질을 이야기하게 되면
이러한 저급취향에 대한 '비난'도 함께 몰아서 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되어야
우리는 우리의 취향이 맞네 틀리네 하는 검증을 안 받는 사회가 되는 겁니까?
Posted by 작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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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toleration or tolerance)이란 일반적으로 자기가 나쁘다고 믿는 것을 다른 사람이 믿을 때 이를 용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 자체도 별로 마음에 드는 건 아닙니다.
용인이라니? 감히.
제가 생각하는 관용이란
일반적으로 내 생각에 나쁘고 부도덕하고 몰상식한 것이라고 해도
타인이 그것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때
그 타인의 생각이 제3자의 권익을 침해하고, 제3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 것'이 관용입니다.
"용인"이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참는 것,
다른 하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참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 둘다 나와 무관한 제3자의 행위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밖입니다.
참는다는 것의 의미는 여기에선 '하고 싶은 걸 억지로 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타인의 신념에 대해 뭘 하고 싶은 거겠어요?
'간섭'이겠죠. 간섭과 판단.
이건 애초에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면 안 되는 것이므로 위의 정의는 너무 협소합니다.
아무튼,
관용이란
일반적으로 내 생각에 나쁘고 부도덕하고 몰상식한 것이라고 해도
타인이 그것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때
그 타인의 생각이 제3자의 권익을 침해하고, 제3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잘 봐주세요.
그 타인의 생각이 제3자의 권익을 침해하거나 제3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일이 아니어야
관용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생각해봐달라는 겁니다.
인종차별자에 대한 관용?
남녀차별자에 대한 관용?
소아성애자에 대한 관용?
강간범에 대한 관용?
수구꼴통들에 대한 관용?
이건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인종차별자들은 타인이 무슨 피부색을 가졌건 자신들에게 주는 피해도 없는데
그걸 걸고 넘어지는 인간들입니다.
남녀차별자도 마찬가지죠.
소아성애자는 자신의 성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상대방이 피해를 입습니다.
이렇게 쭈욱 생각해보세요.
뭔가 떠오르시는 거 없습니까?
예.
인종차별자들이나 남녀차별자, 수구꼴통 같은 인물들은
자신들이 타인에 대한 관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관용이란 어떤 면에서는 쌍방적인 것이죠.
자신이 타인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자유를 주장하는 싸가지들에게 베풀어줄 관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관용의 한계가 보이시나요?
관용은
관용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동성애 이야기 끼워넣어보겠습니다.
동성애를 비난하고 부도덕하다고 말하는 청교도적이거나 유교적인 분들의 성적 취향을 생각해보자구요.
일반인들이 '건전하고 건강한' 성취향이라고 생각하는 범위 안에 모두 머무르실까요?
웃기고 앉아있죠.
동성애를 비난하는 분들 중에 바람피우는 분이 한 분도 없어요?
미성년 여자애들 보고 섹시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없구요?
자신의 아내나 애인에게 변태적인 옷을 입히거나 때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분 없을까요?
우습지 않으십니까?
그럼 좀더 봐줘서, 정상적인 부부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그런 취향들을 말한다고 쳐도,
그걸 다른 사람이 '부도덕하고 지저분하다'라고 말하면 그분들은 알아서 그만둘까요?
웃기네요.
원래 정상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부드러워야 하는 법이죠.
타인의 취향에 엄격한 사람들일수록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요.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은 많이 파놓고,
타인이 빠져나갈 구멍은 다 막아놓는 법이죠.
이렇게 다 막힌 곳에
관용이 어떻게 숨쉬고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다 질식해 죽어버렸죠.
Posted by 작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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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킹-크리스챤은 동성애를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먼저 이 글은 기본적으로 크리스챤을 대상으로 쓴 글임을 밝힙니다. 애림님처럼 기독교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는 동성애자가 많이 있습니다. 또 푸리님처럼 동성애 때문에 기독교를 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동성애에 대한 박해의 가장 큰 세력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와 상관없는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때, 그것은 주로 항문성교에 대한 거부감에 기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극장에서 동성애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나 군대에서 상급자에게 '따먹혔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흔히 접했던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에서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거부감이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거부감보다 훨씬 덜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일 것 같습니다.
80년대 말에 저의 대학 여선배는 공공연하게 자신과 자신의 친구가 동성애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진정 성관계를 가졌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자신들의 친밀한 관계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식으로 공공연하게 자신들이 동성애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는 여성 동성애자의 '커밍 아웃'을 사소한 것으로 만듭니다. 그로부터 15년 정도 지난 요즈음의 분위기는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동성애에 특별한 문제가 아니고, 항문성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동성애를 허용하니 마니 하는 것은 좀 우습습니다. 기껏해야 '드러운 놈들'하는 비난 정도나 할 수 있겠죠.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관용도의 차이는 이유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성애를 뜻하는 sodomy라는 말이 소돔과 고모라의 그 소돔에서 비롯되었고, 레위기에서는 동성애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에서 종종 일어나는 동성애자 살인이 바로 기독교인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낙태시술병원에 대한 테러가 기독교인에 의해서 행해지듯이 말입니다. 나치의 동성애자학살도 유태인학살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바울사도는 수차례에 걸쳐 동성애를 비난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동성애자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호의적인 방식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 기독교계의 공식입장입니다. 불쌍한 동성애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품안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리고 만약 이성애자가 되는 것이 정말 하나님 풍안으로 되돌아오는 것의 문제라면, 크리스챤에게 이것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값어치가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크리스챤이고, 바울사도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게시판에서 동성애 문제가 사소한 문제가 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동성애가 죄라면 그것은 사소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저는 성경을 믿지도 않으면서 감히 크리스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을 믿는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동성애자를 죽이고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성경을 믿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것은 성경에 쓰여 있는 말들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 쓰여있는대로 하나님이 먼저 밤과 낮을 구분하고, 그 다음에 하늘과 땅을 구분하고, 그다음에 동식물을 만들고, 그 다음에야 해와 달을 만들었다고 믿는 것이 성경을 믿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직도 이 구절을 그대로 믿고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주장하는 협회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맥락의존적인 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50년쯤 후에 대한민국의 수도가 다른 도시로 옮겨진다면 이 말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닌 것이 됩니다. 이것을 부정하려는 기독교인은 지금도 돼지고기는 먹으면 안되고, 두가지 이상의 직물로 만들어진 옷은 입으면 안됩니다. 맥락의존적인 진리를 부정한다면, 신부님이나 수녀님, 또 바울사도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람들이 됩니다.

성경에 대한 믿음은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단지 성경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요즈음 사람들, 특히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멋대로 생각해낸 것이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암몬과 모압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들에게 속한 사람은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룻이 바로 모압사람입니다. 그리고 룻기에 따르면 룻이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됩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하지 않는다면, 다윗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주의자들에게 끊임없는 비난을 받았다는 것은 새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러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완성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주목할 것은 기존의 율법을 폐하고 새로운 계명으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새 계명이 기존의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맥락의존적 진리는 맥락이 바뀌면 더 이상 진리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맥락의존적인 진리만을 제시한다면, 모든 맥락에 따라서 그에 해당하는 진리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능한 맥락의 수효는 무한하고 이에 따른 맥락의존적 진리를 모두 제시하려면 무한히 긴 책이 필요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맥락의존적 진리들을 관통하는 원리, 새로운 맥락이 등장했을 때 적용할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원리를 제공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서로 다른 맥락은 외견상 동일한 행위를 실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행위로 만듭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살인입니다. 그리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사람입니다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사형제도를 금지하는 계명은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정신은 살인을 할 만한 미움을 갖지 말라는 뜻이지, 사람을 죽이는 행위 자체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성경은 분명 동성애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때의 동성애가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동성애와 같은 의미의 동성애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동성애가 극장에서 옆에 앉은 사람을 성추행하고 군대에서 하급자를 성폭행하는 행위를 의미한다면, 동성애는 금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적지향이 동성을 향한다는 의미에서의 동성애는 이와 같은 의미의 동성애가 아닙니다. 그리고 성적지향이 동성을 향한다는 의미에서의 동성애 개념은 제가 보기에는 20세기에 확립된 것입니다. 우리가 논의하는 동성애가 이러한 동성애 개념에 기초한다고 하면,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동성애는 이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봅시다. 먼저 소돔의 경우부터 보지요. 두 천사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집에 방문했을 때, 소돔사람들은 집을 에워싸고 롯에게 그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을 강간하겠다는 것입니다. 롯은 이들에게 그 사람들은 자기 집에 온 손님들이니 내버려두고 그대신 성경험이 없는 자신의 두 딸들을 데려다가 그 애들을 대신 강간하면 되지 않겠냐(!)고 합니다. 소돔사람들은 막무가내로 롯의 집을 침입하려 하고 롯마저도 해꼬지하려고 합니다. 소돔사람들이 벌받은 것이 동성애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동성애자들이 강간을 했으니 동성애를 허용하면 안된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레위기에서 동성애자를 죽이라고 이야기했을 때의 맥락은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레위기가 원래 맥락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어떤 기독교인도 지키지 않는) 복잡한 제사양식과 (대부분의 경우 역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경쓰지 않는) 무엇이 부정한 것인지에 대한 지루한 설명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성경통독을 시도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레위기가 그 첫 번째 관문이 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레위기가 돼지고기는 먹지말라, 두가지이상의 직물로 된 옷을 입지말라, 또 간음한 여자를 죽여라 따위의 율법을 제시하는 곳입니다. 유명한 베드로의 환상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속되다고 생각해서 먹지 않으려 했던 것이 바로 레위기에서 부정하니 먹지말라고 한 것들입니다.
바울사도가 동성애를 비난했을 때의 맥락도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쓰여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때는 헬라문화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시절입니다. 이 게시판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헬라시대의 동성애는 나이많은 남자가 십대소년과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원조교제였습니다.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야 절제의 미덕을 중시했던 사람이고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지 말고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라고 이야기한 사람이니, 그가 가졌던 동성애적 관계에서 상대자가 되었던 소년의 영혼을 돌보는 것이 더 중요했겠지만, 이것이 당시에 일반적인 관행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큰 오해입니다. 진중권씨가 푸코의 책을 소개하면서 쓴 글(이 게시판 '140. 쾌락의 활용')에서 소위 '미학적 절제'가 그리스시대 동성애의 일반적인 모습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또 소크라테스의 절제가 더 큰 쾌락을 위한 절제였는데 기독교 문명이 시작되면서 영혼을 위해 육체를 경멸하는 도덕적 코드로 변질되었다고 이야기되었는데, 제 생각으로는 이 중에 맞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미쉘 푸코가 플라톤의 대화편 중 "향연" 한 편만 읽고 그 내용을 그리스 전체로 일반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향연"에서

묘사하는 '계단론'이란 당시 만연한 동성애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성욕과 쾌락에 탐닉하는 당시 동성애의 모습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의 '더 큰 쾌락을 위한 절제'와 철학자의 절제를 비교하고 '더 큰 쾌락을 위한 절제'를 비난합니다. 육체를 돌보지 말고 영혼을 돌보라는 이야기는 기독교 문명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육체는 영혼의 감옥으로 묘사됩니다. 여담입니다만, 그리스철학을 공부한 것으로 보이는 바울사도는 "파이돈"을 비롯한 플라톤 철학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평생 육체는 무조건 죄악으로 여기는 영지주의와 싸웠던 동시에 육체보다 영혼을 돌보라고 주장합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한국 기독교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평생에 걸쳐 그토록 반대했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합니다. 육체는 무조건 나쁘다는.) 그의 영지주의와의 싸움을 철학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신플라톤주의에 바탕을 둔 영지주의가 플라톤의 잘못된 해석이라는 주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플라톤의 또다른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상대자로 칼리클레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사람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을 대변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사람은 쾌락이 곧 선이라고 생각하며 쾌락을 무조건적으로 추구할 것을 주장합니다. 바울사도의 동성애 비난은 이러한 맥락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플라톤과 바울의 차이라면 플라톤이 무조건적 쾌락의 탐닉을 영원한 앎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할 것을 요구했다면,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둘은 견해를 달리했지만, 양자 모두 일시적인 것에 대한 사랑을 영원한 것에 대한 사랑으로 바꿀 것을 종용했었던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동성애(정확히는 남색)을 비난할 때 그는 동성애만 비난한 것이 아니라, 육욕에 탐닉하는 모든 행위를 비난하면서 그 중 한 예로 동성애를 든 것 뿐입니다. 성적지향으로서의 동성애개념을 당연히 가지고 있지 않았던 그에게 동성애는 무절제한 섹스의 한 예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에서 금하는 동성애는 우리가 지금 논의하는 동성애가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성적지향으로서의 동성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그 당시에 이러한 동성애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이제 우리는 성경이 쓰여졌던 맥락과 다른 맥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맥락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할지를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에게서 배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현재 기독교계의 공식입장인) 죄를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과, 죄가 아닌 것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똑같이 대하는 것. 예수님은 그 두가지를 모두 보여줍니다. 간음한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들을 내치시고, 그 여자에게 '가서 더 이상 범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지하듯이 이것이 기독교계의 공식입장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현 기독교계가 바울사도가 2000년 전에 가지고 있던 동성애개념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성애는 무절제한 섹스다! 두 번째 방식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주지하듯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의 순수혈통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유대인은 유대인과만 결혼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정상이고,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눈에 이것을 지키지 못한 사마리아인들은 비정상이고 부도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어서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웃으로서 진정한 사랑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성적 지향으로서의 동성애에 적용시키면, 성적 지향이 이성을 향하는지 동성을 향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다! 저와 게시판에서 몇번 대화를 나눈 씨제이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성애 엘리트주의를 경계한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에 대한 이중잣대를 경계한 것이었습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저는 이성애자이건 동성애자이건 무절제한 섹스를 즐기는 사람에게 그러한 행위를 중단하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하는 동성애자에게 동성애를 그만두고 이성애자가 되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문제가 기독교인들에게도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와 같은 정도의 사소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생애 동안,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사후 제자들은 새로운 맥락을 맞이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베드로의 환상에서 부정한 음식은 바로 이방인을 뜻하는 것이었고, 바울사도가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고 한 것 역시 복음이 이방인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기독교는 20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언제나 새로운 맥락을 맞이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각 시대의 정통 기독교계는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에서 갈릴레오는 용케 목숨을 건졌지만, 수많은 지동설자들이 죽어갔고, 종교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노예제를 정당화했고 (노아의 아들 중 셈이 백인의 조상이고 함이 흑인의 조상이라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하는 한국목사님들이 계십니다), 식민지 지배를 주도했습니다.

저는 끝으로 바울사도가 했던 이야기를 조금 고쳐하고 싶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이성애자들에게요 또한 동성애자들에게로다(순서는 시간적 순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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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한겨레 '동성애,커밍아웃, 성전환' 토론방

▒ 게시일 : 2001-06-30 오후 7:10:10 ▒ 번호 : 165 ▒ 글쓴이 : 썬킹

Posted by 작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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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나, '남자동성애'에 관련된 만화들의 주된 독자층은 여자라고 합니다.
물론 그 만화에 대한 대부분의 남자들의 반응은 '징그럽다'가 대부분이므로 주된 독자층이 여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여자들은 남자동성애 만화에 열광하는 것일까요?
애초에 동성애라는 것에 대해 혐오감은 커녕 '관심'도 없던 제가 만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이건 '동성애' 만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동성애에 대한 고민,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고통 등이 들어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해피엔딩 만화에선 그런 걸 두 사람의 사랑으로 극복해내죠.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BL만화(야오이만화)를 접하기 전에 제가 본 것은 지극히 평범한 '순정만화'들이었습니다.
이 순정만화의 역사는 무진장 길죠. BL만화에 비해서요.
그러다보니 소재 고갈인지, 아니면 자극의 강화 차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한 사랑, 마음 따뜻한 그런 순정만화를 접하는 건 정말 어려워졌습니다.
나오는 주인공들은 죄다 엽기적이고, 나오는 스토리들도 죄다 비정상입니다.
제 기억에 19금 만화라고 기억하는데 치사×뽕따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이 만화, 초반부터 2권까지 보고 떼려쳤습니다. 아주 기분이 더러워서요.
남녀주인공은 주구장창 벌거벗고 난리를 치지만 성관계만은 안 합니다.
아주 질질 끌어요.
여주인공이 마스터베이션까지 보여주는데도 성관계는 안 하고 끌어갑니다.
왜요?
조금 지나다가, 여주인공이 괴상한 남자등장인물에 의해 약에 취해 강간을 당합니다.
그 소재가 등장하기 위해 그렇게 질질 끈 겁니다.
내 사랑 안경군인가 하는 만화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둘이 주구장창 같이 있으면서도 관계를 하지 않다가
결국 여주인공은 다른 남자등장인물에 의해 강간을 당하고야 맙니다.
이런 만화들은 보고 나면 며칠씩 기분이 더럽습니다.
특히나 감정이입을 하고 만화를 보고 나면 아주 오랫동안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주인공들은 없고, 모두 괴상한 사람들만 남발되고 있는 현실이죠.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BL만화입니다.
대부분의 BL만화의 스토리들은 초기 순정만화들과 비슷합니다.
서로 말못하고 오해되는 사랑의 감정,
주변 환경에 의해 억지로 갈라져야 하는 아픔,
혹은 일방의 오해에 의해 권력과 돈으로 고통당하는 다른 편과의 사랑
이런 스토리들이 기본으로 깔려 있습니다.
엽기적이고 질질 끌면서 주인공에게 가능한 한 많은 고통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스토리도 없어요.
장편보다는 대부분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단편 안에서 사람의 감정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는 거죠.
즉, 여성독자들에게 BL만화는 동성애만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동성애 만화에서 '공'과 '수'로 표현되는 쪽 중에서 '수'는
'여성'을 나타내고 대변하는 사람들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수'는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독자들은 자신의 외모나 현실에 대해 비교하고 자괴감에 빠지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 '수'의 사랑받음에 대해 동조하고 즐길 수가 있는 겁니다.
왜 여성독자들에게 '백합물'이라고 하는 여성동성애 만화가
남성동성애 만화만큼 인기가 없는 지 여기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대부분의 남성동성애 만화의 주인공들은 둘다 꽃미남입니다.
영화 '쇼걸'의 감독이 '가슴 둘 보다는 가슴 넷이 낫다'라고 말한 것처럼
대부분 레즈비언 포르노의 시청자는 여성동성애자가 아니라 보통 남자들입니다.
그들은 남성동성애는 보고 징그럽다고 하지만 여성동성애는
꽃미녀 두 사람의 누드신과 러브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징그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성동성애 만화의 독자들은 남성 동성애 자체에 대한 개념보다는
꽃미남 둘, 차가운 냉미남과 어리숙하고 따뜻한 미남 둘을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동성애 만화에 열광하는 것이죠.
이 BL만화붐이 남성동성애자들, 더 나아가서 여성동성애자들의 사회진출에 도움을 줄까요?
전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반반인지는 나중에 더 쓸 기회가 있을 겁니다마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회의 절반인 '여성'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혐오감을 줄여주고
그들이 '성적 쾌락'만을 추구하며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장점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홍석천 커밍아웃' 사건 때도 보셨겠지만
게이, 동성애자들에 대한 시선도 '외모중심주의'로
꽃미남 둘이 만나는 동성애라면 인정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혐오의 눈길을 던질 수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BL계 소설들의 두 주인공들의 '외모묘사'를 한 번 보세요)
이 두 양날의 검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비록 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사회의 구성원들 중 일부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취향' 때문에 억압을 받는다는 건
제가 사는 사회의 불건전성을 너무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두렵거든요.
Posted by 작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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